주변이 다 논과 밭이었다. 그곳에 커다란 창고가 세워져 있었고 높은 천장을 막아 복층으로 나눈 곳에 L의 작업실이 있었다. 빽빽한 건물 숲이 익숙한 내게 L의 작업실 풍광은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몇 달 뒤 한 모임에서 몇 사람과 함께 만난 L은 그간의 일들을 얘기 해 주었다. 바뻤단다. 일도하고 작업도 해야하고 그외의 일들도 해야하고 그리곤 또 일이 있고. 한편으론 부럽고 한편으론 염려도 하는 우리들에게 L은 이렇게 얘기 했다. 최근 너무 바쁜 날들을 보내면서 자기는 이렇게 생각했단다. 나는 가난하겠구나…하는. 일과 작업을 잘 병행하면서 게다가 일들이 넘치고 있는데 가난하겠구나라니?

살다보면 한번씩 나 잘 살고 있는거 맞나? 나 뭐하면서 살고 있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때가 있다.가끔은 내가 나로 사는건 뒤로 미뤄두고 지금 당장 살아내야 할 사람이 따로 있는것 처럼 허겁지겁 살게 되기도 한다. 아마도 그렇게 더 많이 살고 있는 것도 같다. 그러다 한번씩 뒷통수가 쎄하다. 그러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생각. 나 뭐하는 거지? 나 왜 사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이런 상황이 정신이 나가야 되는 건 딱히 아닌가 보다. 무엇보다 정신 차리고 열심히 살고 있으면서도 늘 그림자처럼 내 몸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 나는 누구 여긴 어디.

L도 여지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날따라 그림자가 소리쳤겠지. 그리곤 L은 선언처럼 말했다. 나는 가난하겠구나라고. 무엇보다 L은 사는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대로 살기로 선언한 것이다. 많아지는 부수입대신 토해낸 시간들. 이일 저일에 공들이는 시간대신 토해낸 작업하는 시간들. 그리고 점점 자신의 그림자 밟는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오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

살아갈수록 나를 대면하고 싶지 않다. 왠만하면 나를 잊고 싶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피곤하기 때문이다.괴롭기 때문이다.괜히 목덜미가 걸리고 뒷통수가 따깝기 때문이다. 이젠 왠만하면 대충 나를 잊고 살고 싶다.그리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가난하게 살게되겠구나 라니! 어떻게 그렇게 가차없이 선언하고 당당하게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날 나는 나를 들고 집엘 올 수 있었나? 너무 작아져서 나를 찾을 수나 있었나 모르겠다.

몇달 후 다시 만난 L에게 부탁했다. 이런저런 작업을 진행 중인데 당신의 흔적들 부스러기를 갖고 싶다고.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시간 L은 주민자치센터의 신청서를 보내왔다.그리곤 저간의 사정을 얘기해줬다. 한마디로 선언에 쐐기를 박는거였다. 나는 이제 나로 살겠소. 가난하더라도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한대로 살아보겠오. 나는 이제 나답지 않은 부스러기들을 모으는것에 힘을 쓰지 않겠오. 선언을 하고 L은 쓰러졌다. 아마 L을 한번이라도 본 사람은 번아웃이라니! 그렇게 유쾌하고 에너지 좋은 사람도 그런게 오나?싶을 것 같다. 아직은 장렬히 전사를 할 수 없지! 그래서 제발로 전장을 찾아가듯 찾아 간 곳이 주민자치센타였다. 자신이 번아웃상태라는걸 인정하고 다시 제대로 일어서고 싶었단다.

자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 봤다. 자치(自治)는 자신이나 자신들에 관한 것을 스스로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을 뜻한다. 지방 자치의 줄임말로도 쓰인다. 아하 나는 누구인지 여긴 어디인지 확실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나는 나에 대해 책임지고 살수 있어야 겠다.

시원한 바람같이 유쾌한 L의 선언에 박수를 보낸다.

흔적 수집- 주민자치센터 신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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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져 작업

고장난 황동 시계 , 샴페인 코르크 마개, 레터링스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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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 나는 가난하겠구나 -황동 시계, 샴페인 코르크뚜껑, 레터링스티커